안정의 반대말은 발전이다

작성자
Luke
작성일
2020-06-30 09:57
조회
66
우연하게 내가 가진 신용카드를 자세히 보게 됐다. 리더기를 지나가며 생긴 무수한 잔 금들과 IC 칩 위에 생긴 생채기들이 눈에 띄었다. 자연스레 무심히 지나갔던 신용카드의 소중함에 대해 다시 생각했고, 지난 일들이 머릿속에 리와인드 됐다. 노트 반 정도의 플라스틱 박스엔 내가 지녔던 신분증들과 자격증들이 있다. 매 쿼터 학기마다 바뀐 대학 학생증들과 도서관 출입증, 운전면허증, 미국 노동 허가증, 영주권들, CPR 라이센스, 수상 인명 구조 라이센스, 그리고 스웨덴 임시 거주증들이 수십 장 빽빽하게 차여있다. 은행 관련 카드들은 정보보호 때문에 다 폐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각해보면 그 카드 중 하나를 가지려고 얼마나 애를 썼나 다시 생각이 나고, 지금도 그 카드 하나에 운명을 걸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질문을 받는다. 한 나라에서 고작 10만 원 정도의 한도를 가진 백화점 신용카드를 만들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한도가 무한인 연회비 20만 원짜리 플래티넘을 거쳐, 다시 다른 문화에 가서는 신용카드가 발급 불가한 상태로도 살았다. 지금 한국에서도 신용카드를 만든 건 한국에 온 지 한참만 이었다. 아니 신용카드뿐 아니라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다 새로 만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롤러코스터라고 내 삶을 표현하지만, 떨어질 때 꽤 큰 행복이 있었음을 기억해보면 그리 고통은 아니었다. 마치 따뜻하고 배부른 상태에서 배낭 하나 메고 먼 길을 또 떠나는 방랑자 같은 시간이었다.

안정을 무엇보다 그리워하고 영원한 안정을 찾는 것이 인간의 꿈이라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따뜻하고 배부른 삶이 가장 동물 다운 삶이 아닐까 생각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처럼 혼란한 시대에는 안정이란 단어가 달콤하게 다가올 것으로 짐작한다. 안정은 발전과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안정을 뛰쳐나가 다시 기약 없는 다른 삶을 살아보려고 한 내 가장 큰 이유는, 그 끝이 보였기 때문이다. 그냥 그렇게 가장 사람답게 타협하기에는 내 하나뿐인 삶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안정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보다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서 도전적인 삶을 살아보라고 권하기 어렵다. 그 이유는 집고양이가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고, 그 사람이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용을 읊으며, 여러 사람 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자신을 가장 너그러운 사람으로 만족한다. 모나면 정에 맞고, 사회의 부품이라도 먹여만 달라고 기원하기도 한다. 특히 요즘처럼 하루아침에 신분이 바뀌고, 자신이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상황이 많이 일어나는 시기에는 더욱 안정이란 말에 따뜻함을 느낀다. 넘치는 자신의 능력을 감추고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고고한 선인들을 그리워한다. 마치 자신이 그런 것처럼 몰입하며 주위와는 어울리는 척 포장하기도 한다. 이것이 안정의 결과다. 기억해보라 그 많던 방학의 시간들을 어떻게 흘려보냈으며, 무수한 시간들을 지금까지 어떻게 썼는지 되짚어보라.

그래서 오히려 지금의 여러 어려움들, 막힌 터널 속의 압박 속엔 앞으로 바뀔 시대에 대한 기대가 있다. 긍정적인 시각 때문이 아니라 긍정적이어야 만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발전하고 더 나은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 가장 도전적이고 기회가 많은 시기에 가장 움츠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