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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치졸하고 비 이성적인 사회인가? 북유럽의 감성과 솔직함은 없는가?

Photo from VisitFinland.com

지난달에 이어 이번 달에도 해외를 나갔다 왔다.  하나는 출장이고 다음은 여행이었다.  2주 후 또 출장 계획이 있다.  그런데 출국 때와 입국 때의 마음가짐이 다르다.  마치 어느 후진국을 방문할 때의 긴장감이 들고, 스톡홀름 알란다 공항에서의 포근함보다 인천에는 전투적(?) 긴장감이 있다.  이 분위기가 뭘까.  한국 사회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답답해하고, 헬조선이라 외치는 사회의 꽉 막힌 소화불량이다.  한국인이 만들었고 한때 즐기며 지내던 그 긴장이 스스로를 죄고, 대를 이어 문화로 바뀌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너무 머리가 좋아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너무 똑똑한 것 같아서 남보다 한 발짝 먼저 가려고 팔을 휘저었기 때문이다.  그 주역은 지금의 7-80대에서 시작하여, 4-50대의 주도로 집행됐고, 2-30대가 고스란히 겪고 있다.  오히려 지금의 초등학생 중에는 윗세대의 문화보다 자유스러움이 느껴진다.  한국 사회를 헬조선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역시 이곳이 우물인 줄 알지만 얼마나 큰 우믈 인지, 얼마나 다른 우물인지도 모르고, 그냥 우물 탓만 하는 개구리다.

나는 감성적이란 말이 좋다.  생산성에 가치를 부여하는 경영자들은 싫어할 수도 있는 것이지만, 사회의 시민들이 감성적인 마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 대한 솔직함이고, 삶의 여유란 생각을 한다.  북유럽이 감성적이란 말을 쉽게 우리는 하지만, 북유럽 사람 한 사람이 북유럽을 감성적으로 이끄는 건 아니다.  그 사회의 시민 모두 어느 수준의 감성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감성은 스스로의 느낌 가치다.  교육으로, 정책으로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가치다.  스스로에게 솔직한 사고와 반성, 느낌, 기억 등의 자각이 계속 반복되며 하나의 느낌으로 만들어지는 두뇌 센싱의 하나다.  그래서 그 감성들은 방향과 깊이가 다르고, 범위도 다르다.  즉, 얼마나 생각을 하고 사는가에 대한 사회적 습관이다.

나는 한국을 오해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잘못 보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산업 발전기 등의 지긋지긋한 시대를 살았거나, 그 사고에 휩쓸린 사람들의 두뇌구조가 다를 수 있다고 오해했다.  아주 사고 수준을 낮고 치졸하게 폄하했다.  그런데 이건 그 사람들 자체를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다.  사회적 환경이나 삶의 목표, 이유 등이 현재와 확연히 다른 것을 이해하고, 그런 혹독한 환경에서 무슨 감성적인 가치를 논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짐작했다.  그래서 과거 세대로부터의 단절 중 감성적인 가치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큰 잘못이었다.  내가 그렇게 싫어하고 미리 짐작하는 한국 문화를, 그에 따라 필요 없는 마음의 짐을 지고 평생을 뒤뚱거리는 모습을 나 스스로 저질렀다.  쓰레기 통속에서도 장미는 피어나고, 통속의 행복한 디오게네스를 나는 한국에서 알게 될 줄 몰랐다.

TV 조선의 시골 빵집이란 프로그램을 보았다.  개평 마을에서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만든 빵도 먹고 각자의 시도 지어보는 진행이었다.  전직 프로듀서와 제작자로써 나는 일반인의 출연을 좋아하지 않는다.  노력한 만큼 가치가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인이 가치가 있으려면 헐리웃 기획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시(?), 그것도 한국, 시골, 그중에 노인들을 대상으로…  대부분 그런 시들이 지나고 내 짐작이 사실이 돼갈 무렵, 한 할머니의 시가 나왔다.  공부도, 책도, 문화생활도 잊고 산 시골 노파의 담담함이 묻어 나왔다.  먼저 간 할아버지를 그리면서, 자신이 지금 행복하다는 사실이 미안하다는 말이었다.  “미안한데 나 요즘 행복해요.  내가 행복해도 될까요.” 하는 그리움과 미안함이 교차하는 감정의 솔직함이었다.  아!  한국의 문화는 치졸하고 속 좁은 감정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었구나.  누구나, 그것도 북유럽 어느 그림 같은 환경의 삶과도 지나치지 않는 감성이 살아있구나.  그런데 왜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걸 모르고, 꼬리에 불붙은 강아지 마냥 뛰어만 다닐까?  뭘 하는지도 모르고,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그냥 그냥 그렇게 살다가 2-30대가 지나 하늘을 쳐다볼까?  50대 들어서며 하루하루를 곡예하듯 살며 내가 뭘 하며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살지 생각은 커녕, 원망만 원망만 늘어갈까?

그 답은 단순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정의가 없어서 그렇다.  굶을 때는 밥 먹는 게 삶인 줄 안다.  돈 없을 때는 돈 버는 게 삶인 줄 안다.  먹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고, 가진 거 없을 때는 배우고 먹고 가지면 그게 삶인 줄 안다.  아니다.  그건 자연계의 동물 얘기다.  우린 사람이다.  자유의지를 갖고, 내 앞을 스스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래서 좀 부족해도, 좀 배고파도 참을 수 있다.  그게 희망이고, 자유다.  내 앞의 미래가 왜 장밋빛으로 빛나야 하는가.  내가 왜 싫어하는 그 일을 하려고 밤낮으로 공부를 해야 하는가.  내가 좋아하고 삶의 보람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일에 대한 생각과 그 일로써 사회의 보람을 느끼는 내 존재에 대한 자각은 어디에 있는가.  이 모든 사실, 나는 인간이고, 자유의지와 희망을 가진 존엄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교육은 도대체 한국 어느 사람이, 누가, 어디에 있기나 한가?  장담한다.  장관도, 교장도, 교수도, 어느 정책 담당자도 들어보지도 못한 이야기 일 것이다.  자라나는 한국의 미래들에게 그럼 누가 삶의 교육을 해줄 것인가.  배운 사람도, 아는 사람도, 경험한 사람도 초극소수인, 그러면서도 입을 다물고 무시하는 이 환경에서 누가 삶의 가치들을 전해 줄 것인가.

한국의 사회는 감성이 살아있다.  순박하고, 솔직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멋스럽고, 세련된 마음이 숨 쉬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이 모든 한국적 감성들은 꼭꼭 숨기고 있다.  학벌에 남 밀어가며, 따돌림에 한탕 당기려고 아름다움은 다 가진 후에 해보려고 꼭꼭 숨기고 있다.  사실은 자신이 원하는 걸 모두 다 가질 수도 없지만, 다 가진다 해도 이미 하이드나 센과 치히로의 돼지같이 다른 모습으로 스스로를 변화시킨 이후다.  자신의 멋스러움, 한국의 감성적 가치, 여유, 시민의식들은 모두 치졸함과 비 이성적인 가치로 바뀌고 난 후다.  북유럽의 삶은 개인에 대한 자각이 제일 먼저다.  내가 얼마나 존엄하고, 자유로운 존재인지 스스로를 생각하는 게 먼저다.  그러면서 사회를 아끼고 미래를 생각하며 스스로의 보람에 희망을 둔다.  평등을 기본으로 내가 가치를 둔 직업에서 보람을 찾는다.  누가 의사, 변호사가 사회에서 존경받는 직업이라 하는가.  어느 직업이든 그 직업의 공헌에서 존중은 발생한다.  과잉진료에 뒷돈 챙기는 의사에게 존경을 표현할 수는 없다.  법정 싸움이 늘어나도록 부채질하는 변호사들이 사회를 위해 무슨 일을 하는가.  사회 어느 직업이든 스스로의 보람이 있으면, 여유가 생기고, 여유를 느끼면 사회를 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것이다.  이게 감성이다.  자유고 희망이다.  어느 사회건 그 사회의 미래는 희망이 있는가에 달려 있다.  나는 한국의 희망을 본다.  아주 시골, 노년 계층에서도 피어나는 자유를 본다.  한국이 달려온 그 노력의 아주 조금만이라도,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를 바란다.  비록 수십 년, 수백 년이 걸려 바뀌는 사회적 환경이어도 오늘 시작해보길 원한다.

 

by L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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