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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북유럽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Photo by Melker Dahlstrand / imagebank.sweden.se

노르딕후스라는 이름으로 북유럽을 알린지도 7년 정도가 된다.  처음에는 단순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 시작한 일이 어느새 점점 커져버렸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한때는 북유럽이 환상에 둘러싸인 나라라는 시절이 있었다.  이는 한국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그랬고 너무나 아름다운 자연에서 둘러싸여 완벽한 복지 사회에서 산다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보다 개인의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에 더 스웨덴이 끌렸었다.  내가 살았던 순간을 기억할 때마다 난 행복했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한국에서 북유럽에 관한 환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사람 사는 곳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상식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다면 이해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의 시간이 지날수록, 또 삶이 팍팍하고 외로운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더욱 북유럽의 가치들이 그립다.  나는 오늘의 한국에서 북유럽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는 인테리어나 디자인으로 시작하는 유아 사고를 넘어서 북유럽을 우리와 비슷한 역사와 문화를 겪은 선배로서 이야기를 풀어보겠다.

 

1. 북유럽의 나라들은 국가 기간산업을 그 나라의 특수성뿐 아니라 부가가치의 관점에서 운용하는 사회다.

전 세계적인 오해가 있다.  북유럽의 나라들은 넘쳐나는 자원과 적은 인구 때문에 노동과 상관없이 높은 생산을 유지할 수 있다는 오해다.  이는 노르웨이라는 한 나라만을 보면 맞는 판단 일수 있다.  그러나 다른 북유럽의 나라들은 넘치는 자원을 생산하여 살지 않는다.  노르웨이의 한 어촌에는 오일 클락이라는 시계가 있다.  이 시계는 노르웨이의 국부를 숫자로 표시한 것인데, 너무 많아서 국내에 그 자산을 유치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래서 전 세계에 나누어 유치하며 만일 이것을 나누어 준다면 전 국민에게 한화 약 2억 원 정도를 줄 수 있다.  이것에는 이자를 포함한 수익이 또 붙기 때문에 노르웨이는 이 수익으로 연금과 건강보험, 교육 같은 복지에 충당하고 있다.  이 특수성은 단지 노르웨이에 국한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웨이 국민들은 노동과 삶에 있어 근면함을 놓지 않는다.  현재 노르웨이가 누리는 모든 자원과 자연은 후세로 갈 자산이라는 것이다.  자신들은 노르웨이 역사의 한 시기를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욱 발전을 시켜야 한다거나, 더 풍족하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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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산업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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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산업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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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산업 구조

 

노르웨이에 이은 덴마크와 핀란드의 산업 구조다.  누가 보아도 기형적인 노르웨이의 구조가 보인다.  이와 비슷한 것은 중동의 산유국에서 찾는 것이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자원강국 노르웨이 내에서도 예술과 디자인 등 부가가치 산업이 활발하다.  창업 센터를 비롯하여 국가의 미래 먹거리에도 충분한 관심이 있다.  그러나 원유와 해양 관련 산업의 양이 워낙 많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것뿐이다.  수도인 오슬로 근처에는 스타트업 센터가 눈에 띄는 결과로 호응을 받고 있고 많은 한국의 기관에서 참고를 했다.  단순한 디자인, 기능적 공예라는 수식어는 또 노르웨이에서 생산하는 공산품에 모두 붙이기에 충분할 정도다.  그 밑의 덴마크나 핀란드와 다른 점은 전자 기기 산업의 유무다.  굳이 두 나라의 기술을 나눈다면 덴마크는 기계 및 산업 기술에 첨단을 달리고 있고 핀란드는 전자에 강하다.  그리고 덴마크는 낙농 유제품과 부품 산업에, 핀란드는 산업용 재료에 강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두 나라는 모두 작고, 어려운 시기를 보낸 역사가 있다.  특히 핀란드는 넓어 보이는 국토에도 불구하고 채굴 곤란한 자원들과 열악한 농업환경, 자본과 기술의 부족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때 핀란드는 미래를 생각했다.  케코넨을 비롯한 어려운 시기의 지도자 들은 독재라는 누명에도 불구하고 국민을 다시 살릴 방법을 찾았다.  그것은 교육과 부가가치 창출이었다.  그래서 국가적 이해로 디자인과 기술에 집중했고, 전 국민이 높은 교육열을 갖게 되었다.  이는 약 30여 년 후 핀란드의 미래를 바꾸었다.  덴마크는 그린란드와 북해 유전 등 자원 부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원을 그냥 캐서 파는 1차 산업을 유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국의 이익을 낮추더라도 이로 인한 기술과 세계의 여러 나라들과 협력할 기반을 닦는데 주력했다.  그래서 덴마크의 북해 유전은 영국의 BP와 공동 개발, 유지한 것이 많고 이로 인해 자국의 기술, 부품 산업, 기계 산업 등이 크게 성장했다.  국가 크기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조선, 선박, 기계회사 등이 덴마크의 기술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국의 대형 기계회사들과도 친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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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산업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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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산업 구조

 

스웨덴의 산업 구조는 아주 이상적으로 보인다.  국내 생산한 천연자원 등이 보이나 한국과 비교해 큰 차이는 아니다.  오히려 한국은 정제나 가공 등을 통해 부가가치를 높였다.  조금 차이를 보이는 것은 산업용 자재와 화학제품이 스웨덴 좀 더 많고 한국은 조선의 비중이 크다.  스웨덴은 철광석과 임업 자원이 큰 나라였다.  그러나 환경 오염 등을 이유로 국내 요구량을 제외하면 큰 생산을 하지 않는다.  자재의 비중이 화학 제품이나 대체재로 넘어간 것도 한 이유다.  중화학 공업을 유지한 스웨덴은 조선과 항공기술이 뛰어난 나라다.  자체적으로 전투기를 비롯한 항공 엔진을 생산하고, 대형 크루즈선과 잠수함 등 높은 기술력을 갖췄다.  20세기 후반에 밀어닥친 개발도상국의 발전으로 비중이 점점 줄어들긴 했지만 기계와 대형 부품 산업에서는 독보적인 기술력을 가진 나라다.  그래서 핀란드와 마찬가지로 부가가치 산업과 제약, 특허, 금융 서비스 등으로 산업 구조를 변화시켰다.  우리가 감동하는 디자인 분야는 워낙 오랜 시기에 다져진 일이었기에 상품 시장을 세계로 약간 넓힌 것에 불과한 일임에도, 폭발적 반응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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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산업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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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산업 구조

 

참고로 보여주는 일본과 미국의 구조다.  미국의 경우는 넓은 국토에 따라 모든 산업을 균등하게 배열한 것 같은 느낌이다.  첨단의 산업 국가라는 느낌보다 대부분의 산업이 모두 공존한다는 표현이 더 맞을듯싶다.  일본의 경우는 전자, 기계, 산업 부품 등에 첨단을 달린다는 느낌이다.  이는 한국이나 스웨덴이 나아갈 길과 다르지 않아서 자원으로 먹고사는 나라가 아니라 기술과 부가가치 산업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국가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는 것 같다.

위의 구조와 같이 노르웨이를 제외한 북유럽의 나라들은 자원을 이용하여 살아가는 사회가 아니다.  오히려 중화학에 집중했고, 부가가치와 미래 산업에 집중해야 하는 한국과 비슷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주의적 시스템으로 강력한 노조와 노동자의 권익 등을 추구하는 나라들이다.  한국이 경공업을 막 시작하려고 생각하던 그때에 북유럽은 중공업과 항공산업에 집중했고, 한국이 중공업에 막 눈을 떴을 때 북유럽은 노동 운동으로 시끄러운 시절을 보냈다.  북유럽의 노조가 회사와 공생하고, 한국 같은 개발 도상국의 도전에 산업을 더 부가가치 있는 첨단으로 변화시켰다.  그러면서 그들이 세계에 비로소 손짓을 하기 시작했다.  60년대 후반부터 퍼진 스칸디나비아 디자인이란 말은 미국의 흙투성이 카우보이에겐 미래의 모습 그 자체였다.  비하의 목적으로 쓴 말이 아니라, 그 당시 미국의 생활과 마인드가 대부분 그랬다.  흔히 상상하던 21세기가 되면 이란 상상 노트에 인용되는 가구나 자동차의 모습은 스칸디나비아의 디자인 노트를 그대로 가져온 것들이 많았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다른 모습을 빌려 오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한국에서 그렇게 따라 하고 싶은 미래에 대한 비전과 과정, 현재 기간산업이라고 할만한 여러 가지 일들, 국가적 집중도를 높여야 할 분야들…  여러 사람이 고민하고, 노르딕후스도 일부 참여한 프로젝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현재에도 시도된 여러 협력 프로젝을 통해서, 기대하고 앞으로를 진단하려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나는 이 같은 점들 때문에 산업 발전의 선배였던 북유럽이 현재 한국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산유국이나 자원 부국으로 따라가려는 마음이 아니라, 국가 발전의 정도를 걷기 위해 많은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70년대부터 스웨덴, 핀란드와 그렇게 진한 문화교류를 하고 다른 북유럽 국가들과도 아직까지 친밀한 교류를 하는 이유는 같은 길을 가야 하는 친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

 

2. 북유럽의 나라들은 교육을 산업 발전의 바탕으로 하는 사회다.

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특히 한국의 역사를 보면서 교육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 글에도 소개한 한국 교육의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고 판단한다.  신분 이동.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온 신분제 사회, 그 이후 변혁의 시기에서 기회를 독점한 그룹에 대한 동경, 부와 권력이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직접 느낀 경험, 신분제의 몰락으로 기대했던 평등한 사회의 길은 사회적 신분이란 의식으로 바뀐 것뿐이라는 허탈감, 그 외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유로 인해 자신의 가치와 성공을 높이는 길은 교육이라는 관념이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행복이라는 가치나 평등, 존중 같은 북유럽의 가치들이 자리 잡기에는 많은 심리적 갈등이 있다.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했고, 나는 아니라고 했으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심리적 모순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교육의 목적은 개인의 인성과 지식을 그 당시 사회의 인재로 기르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한 목적 외에 개인의 특성, 욕망, 명예 등의 다른 가치들이 한국 교육을 누구나 관심 있게 만든 근본 원인이다.  한국인의 뿌리 속에 항상 사고하고 학문적 결과나 글쓰기를 좋아하는 유전자가 들어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우수한 대학을 가려는 목표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도 물론 아니다.  사회적 분위기.  단지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가장 빠른 길이 교육을 받아 우수한 특정인이 되는 것이라고 종용 받았을 뿐이다.

경제 협력 발전 기구의 최근 조사를 보면 결과가 어찌 되었던 현재 한국의 대학 진학률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60%를 넘어 70%로 향한다.  바로 뒤를 이어 일본이 50% 후반대, 대부분의 OECD 국가들과 북유럽 국가들은 40% 중반에 머문다.  위에서 이야기한 핀란드의 교육 집중 정책으로 핀란드를 다시 부활시킬 때에도 대학 진학률은 비슷했으며, 오히려 수학과 외국어 등 다른 국가와의 시험에선 그 나라들에 밑도는 점수를 보였다.

한국과 북유럽이 교육을 중심으로 발전을 한다는 사실에는 절대 동의하나, 한국은 그 결과에서 이유를 찾았고, 북유럽의 나라들은 과정에 중점을 두었다.  그렇다고 결과가 나빴다는 것이 아니라 더 좋게조차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그 이유는 교육 방식의 다른 점이다.  더욱 효율적이고 생산성에 집중한 결과다.  주당 50시간 넘게 학교 수업에 투자하고, 사교육에 또다시 그만큼의 시간을 투자하는 한국의 교육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가 기형이다.  경쟁에서의 승리가 단 하나의 목표인 한국 교육에 누구도 이상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도 더욱 이상한 사회를 만든다.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이상하다는 판단조차 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 한 수업이 중요한지, 왜 인성이 지식보다 앞서야 하는지에 대해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밀려드는 경쟁에 요령과 수단쟁이로 전락한 교사들이, 또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  그 부모나, 그 교육감이나, 그들의 장관, 심지어 대학에서 교육 정책을 담당한 교수들도 다 머리 깎고 졸린 눈 비비며 이 악물었었던 그 세대다.  그러면서 왜 이게 안되냐고 스스로도 반문할 것이다.  북유럽의 교육 현장에 일 년의 방문 숫자를 따지면 수천 명이 넘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시기도 적어도 몇 년이 지났다.  이제 뭔가 다른 것, 시간이 걸려도 우리 학생들이 정말 필요한 교육이 되도록 할 시도들이 나올 때도 되었지만 그렇지 못함을 또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현재 찾을 만한 다른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특히 미래의 변화에 대응할 수단은 유일한 것이란 점에서 교육에 다시 집중해야 한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발표된 PISA의 2018년 세계 통계를 보면, 위의 추론을 요약한 결과로 볼 수 있으며, 미래 한국의 학습 능력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 짐작도 가능하다.  나는 한국의 학생들이 지난 2013년 이후 왜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디테일에 주목하지는 않는다.  이는 항상 탑티어 그룹에 들던 핀란드가 몇 순위가 뒤처지고, 또 어떤 항목에서는 겨우 10위권에 들락말락 하는 사항에 의문을 보내는 것과 같다.  핀란드 교육부 장관이 밝힌 원인은 다문화 출신의 학생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다는데 있다.  이번 참가율이 약 15% 정도의 다문화 출신 학생들이 핀란드의 집계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장관은 이 결과에 대해 어떤 특이점도 찾을 수 없으며, 핀란드가 교육에 집중하는데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할 것으로 판단한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지속해 나가면 다시 우수한 핀란드 교육의 효과가 나타날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이런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다.  다른 표에서 보여주는 학교 간 학력 격차에서 가장 차이가 없는 국가로 핀란드가 꼽혔다.  핀란드 교육이 중요한 이유로 꼽은 학교 간 학력 격차가 거의 없다는 것은 교육의 평준화가 이루어졌으며, 소득이나 지역, 또는 사교육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그래도 상위권이라는 통계의 오류에 만족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통계의 목적은, 어느 나라의 학생들이 공부를 잘하나 같은 단순한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근본적인 목적은 자국의 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해 각국의 방법을 공유하고 학습하라는데 있다.  교육 관련 기관에서의 한국은 몇 위라는 결과 발표는 유아 사고다.  반에서 일등 하면 사회에서 일등할 걸로 기대하는 단순한 부모들과 무엇이 다른가.  주목해야 할 사항은 이 시험을 시작한 이래로 한국은 학생 행복 순위에서 항상 최하위권이란 점, 학교 교육 외에 사교육이란 다른 학교가 존재하며 이에 투자되는 금액이 연간 2조 원이 넘는 무지막지한 금액이란 점, 16세 이상 65세 미만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독해 능력, 토론 능력, 독서능력 등은 거의 순위를 잡기 어려운 상태라는 점이다.  무얼 말하는가.  한국의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까지 최저의 수면시간으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미친 듯이 공부하고, 그 이후 성인이 되면서부터 연간 독서량이 3권도 안되고, 급격한 학습능력의 하락으로 장년이 되면서 자신의 의견이나 토론을 할 수 없는 상태로 변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다는 점이다.  미국과 스웨덴의 언론들은 2009년 이후의 한국의 기록에 열광했고, 오바마를 비롯한 지도자 들도 관심을 갖고 말할 정도였다.  그 이후 영국의 BBC, 스웨덴의 SVT 같은 국영 방송사들이 한국의 교육에 집중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그 이후의 반응은 한국을 배우지 말자로 선회하고, 가까운 미래에 한국의 순위 하락을 예측했다.  10년이 되지 않아 그래프가 하락곡선을 그렸고 이번에도 여전히 하락을 기록했다.

지금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할 때다.  누구나 교육에 관심이 있고, 미래를 바꾸는 한 수단으로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몇 순위 낮아진 것에 초연한 자세를 취하기에는 우리들 스스로 너무나 모순이 보인다.  나는 다시 북유럽의 현장에서 그 답을 찾고 싶다.  PISA의 결과를 더 높이는 방안이 아니라, 30년 후 한국을 실제로 바꾸고 발전시킬 인재를 기를 방법을 찾고 싶다.  이것을 위해 북유럽에서 어떤 것들을 참조할 것인가.  단 한 가지만 꼽는다면 인성이 그것이다.  인성 관련 부분이 충족되면, 개인의 평등이나 존중 같은, 현재에는 뜬구름 잡는 헛소리로 이해하는 많은 사람들이라도 한 번쯤 생각해 보았을 개인이 될 수 있다.  그 외 시민의식이나 창의력, 각종 사회불안 관련 사고도 현저히 줄어들 것으로 판단된다.  북유럽의 교육은 인성에 바탕해서 사회적 효율성과 생산성으로 끝난다.  내가 배운 교육이 써먹을 수 있는지, 또 이것을 넘어 얼마나 많은 효과를 낼 수 있는지 교육의 목표가 맞추어 있다.  미래 인재, 융합 교육, 창의성 교육… 이같이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한국의 교육 정책 어젠다 중 대부분의 이름은 북유럽에서 왔다.  어떻게 되었는가.  이유는 바탕이 없어서 다들 헛소리로만 듣고 있다가 현 상황이다.  나는 단 한가지 사실에 집중한다.  비록 과정과 결과 등 추구하는 교육의 목표는 달랐을지라도 교육에 국민 모두 관심이 많다는 것.  이 한 가지에 한국 교육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을 본다.  시도에만 십수 년, 결과는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그 긴 시간을 이해해 줄 수 있다면 희망은 이루어질 수 있다.

 

3. 북유럽의 나라들은 개인이 삶의 의지와 행복을 찾는 사회다.

삶의 의지란 단어를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낳음을 당했다고 표현하는 한국의 한 세대에서 불행의 씨앗을 본다.  왜 스스로의 삶을 마치는 수가 늘어가는지, 왜 흙수저 금수저 논란이 일어나는지.  다 삶에 관한 사고가 얽혀있다.  삶이란 사고는 나에서 출발해야 하고 인간이 존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많은 수의 인간이라도, 또 그들의 능력이 크지 않아도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엄하다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것은 지식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오직 부모로부터 시작된 경험이 스스로의 사고로 바뀌게 된다.  사랑, 희생, 봉사, 존엄 같은 개인의 가치들은 경험이란 시작으로 생긴다.  한국의 부모들이 무식하다.  무식하다는 말을 지적 능력이 아니라 인성으로 보고 싶다.  가난하고 문맹의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풍경이 바보 같은가.  한국의 지성들을 길러낸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지식이 없었지만 현명했고, 희생했지만 존경받을 수 있었다.  인성의 이야기다.  내가 번 돈을 상대 배우자가 쓰는 것이 아깝다고 표현하는 부부와 만일 그들 사이에 자녀가 나온다면 어떨까.  개인이, 개인의 자유에 의문을 갖고 행복의 수치를 매기는 사회에서 행복은 없다.  내 학벌로 수입으로 그냥 행복이라고 믿으며 살아갈 뿐이다.  이것이 한국의 미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긴 역사 속에 단지 한 시대의 모순으로 나라가 변하지도 않는다고 믿는다.

북유럽의 근본은 개인이다.  그리고 이 개인으로부터 오는 자유, 사랑, 존엄이다.  이런 단어들에 익숙지 않다면,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라고 이해해도 좋다.  다만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아도 크게 잘못되거나 불행해질 확률이 적은 사회가 사회적 다양성을 가진 건강한 사회다.  이 단계에서 시작하는 발전이나 창의성 같은 생산 요소들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고효율의 결과를 낸다.  법이나 인식 같은 너무나 많은 관계가 존재하는 한국 사회는 스스로의 발전을 막는데 익숙하다.  내가 나아가는 길이 혼자여도 어렵고, 여럿이어도 어렵다.  고효율을 내기 힘들게 보인다.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데 기인한다.  이런 모든 한국 내 비판들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냈다.  이제는 그 길을 역으로 걸어가며 하나씩 걷어내야 될 때라고 생각한다.  북유럽의 문화가 보여주는 사고 가치들은 한 문화의 특성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삶의 지표 같은 가치로도 충분하다.  사고하기 힘들고, 받아들이면서도 이것저것 따지게 될 것임이 뻔하지만 난 충분한 답을 주리라 생각한다.  이제 한국이 필요한 것은 한 장의 설계도나 얼마의 투자금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힘이다.  나는 이 힘의 원천을 개인의 의지에서 본다.

 

4. 북유럽의 나라들은 평등, 존중, 신뢰 같은 의식이 자리 잡은 사회다.

이런 가치들은 역사와 문화의 결과다.  또 개인의 사고와도 연결되어있다.  어찌 보면 스스로 존중하고 자신을 못 믿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믿을 수 있냐는 근본적인 물음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개인의 사고 철학과 다른 점은 상위개념이란 것이다.  이 이야기는 개인의 사고가 확고히 이루어진 이후에나 나올 수 있는 개념이라는 말이다.  평등이란 말은 어렵지 않다.  같은 인간이라는 사고만 있으면 된다.  존중도 어려운 가치가 아니다.  나는 나를 존중하니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이해만 있으면 된다.  신뢰도 그렇다.  내가 믿는 만큼 타인도 나를 믿어 줄 것이라는 개념이다.

한국에서 이걸 반대로 해석하면, 신분과 갑을 관계, 그리고 속임수가 생기는 사회가 된다.  이 이유는 정확히 반대의 사고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빨리, 많이 가지려는 욕심 때문이다.  그래서 교육이란 수단으로, 외국어나 사교라는 수단으로 다른 사람이 가질 것을 독점하는 것이 능력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이점의 교육 효율성은 높았었다.  그래서 사회가 변했고 거의 대부분이 비슷한 동종으로 변신했다.  이제 누구보다 빠르게나 누구도 모르게 같은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사는 게 힘들게 된 것이다.  타고난 팔자란 말이 생기고 수긍하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구속해서 변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드는 것이, 그럴듯한 변명의 거리를 만드는데 유리하다.  그래서 비판하고 다시 비관한다.  개인이 개인이 되지 못한 전형적인 유아 사고다.  부모라는 언덕, 믿음, 신뢰도 급속히 깨지고 있다.  개인적이 아닌 이기적인 기형으로 한국은 나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과 같은 산업구조에서 세계로 눈을 돌리는 것은 당연하다.  오히려 아직까지 뭐 했나 할 정도로 진전이 안되는 분야도 보인다.  이것은 언어적 장벽이 아니다.  사교 문화가 없는 한국의 단점이다.  이런 사실은 오히려 세계를 바라보는데 기회가 많다는 도움을 준다.  그런데 이 발전적 사고에는 평등이나 신뢰 같은 가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란, 김치가 한국을 대표하는 식품이라는, 세계가 한국을 주목한다는 상상은 이제 접기를 바란다.  한국은 그저 아시아의 한쪽에서 기술을 개발시켜 여러 실험적인 산업이 일어나는 나라 중 하나일 뿐이다.  누가 유럽의 어느 문화를 비웃을 수 있으며, 미국의 짧은 역사를 가르칠 수 있을까.  한국은 단지 세계 여러 나라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일 뿐이다.  이것이 평등이다.  중화사상이라는 중국 중심의 가치, 이슬람 파워라는 종교적 신념은 세계 문화에서 비웃음을 부르는 단어일 뿐이고, 스스로 깨치지 못하는 한 어린이가 길에서 떼쓰는 것과 같다.

좀 더 어른으로 생각해야 할 시기다.  극동의 선두 국가였던 과거를 보고, 아름다운 고대 미를 가진 삼국과 고려 시대를 기억해보자.  왜 싸우고 죽이고 서로 경쟁하던 조선의 치욕만을 우리의 역사로 기억하려고 하는가.  충분히 아름다웠고, 충분히 잘 살았던 한반도의 여러 나라들의 문화속에서 이제 생각을 해야 할 때다.  나는 한국이 어떤 상황에서나 주목해야 할 상대로 북유럽을 꼽았다.  사실과 다른 오해도 말했다.  생각은 쉽지만 행동은 느리다.  그리고 마음에서 나오는 행동은 더 느리다.  느린 행동을 한다면 그 사람이 아픈 것이 아니라 깊은 사고를 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란 생각이다.

 

by L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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