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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추모하는 자세

Photo by Tina Stafrén / imagebank.sweden.se

오늘 아침 일찍 부고를 받고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길지 않았던 한국 생활 중 참 많은 장례식에 참석했던 것 같다. 노환으로 생을 마감한 분들이야 그렇다고 처도 일찍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지곤 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으로 태어난것 자체가 미리 죽음을 앞둔 예비자들이란 생각을 아주 가끔씩 하게 된다. 누구나 맞아야 할 죽음을 누구라도 하기 싫은 것은, 누구도 그 사실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 보면 다음 생애 또는 내세에서 다시 이어질 운명이지만 과학적 사실은 없다. 그렇기에 누구에게나 두렵고 상상할 수 없는 미지에 대한 공포가 죽음을 인간과 더 멀어지게 만든다. 그렇다고 안 만날 수도 없지만 말이다.

내가 미국의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한국식으로 흑인 친구의 장례식을 참석한 적이 있었다. 교회에서 진행된 장례 예배는 엄숙한 분위기에서 반쯤 열린 관을 가운데 두고 진행됐다. 예배가 끝나고, 성가대와 함께 미망인의 아메리칸 소울, 흑인 영가가 가미된 가스펠이 진행됐다. 흐느끼듯 끊어지고 다시 저음에서 이어지는 소울풍의 가스펠은 장례 분위기를 엄숙하고 영엄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 노래가 끝나고 갑자기 성가대의 뒤쪽에 숨어 있던 브라스 밴드가 일어났다. 금관악기의 번쩍임과 화려한 의상으로 그들이 크게 연주를 시작한 곡은 “When the Saints go marching in” 빠 빱 빠빰~ 으로 시작하는 행진곡으로 경쾌한 음률을 따라 교회 안에 울려펴졌다. 난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당황한 사이 제일 먼저 뛰어나와 노래와 춤을 춘 사람은 미망인이다. 그리고 서로 손잡고 움직이며 다들 춤을 추기 시작했다. 큰 충격과 경험을 다시 추스른 건 “이제 비로소 하나님께 갈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라는 그들의 기도였다. 과거 노예의 시절부터 그들은 고달팠고 그들의 음악, 음식, 춤은 그들의 해방구였다. 죽어야 비로소 갈 수 있는 천국에 가니 얼마나 좋을까 하는 그들의 염원은 참 가슴 아픈 역사였다. 죽음은 자유이고, 행복한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미국을 풍미하던 레이건 대통령, 그 옆의 낸시 여사는 미국 자유주의의 아이콘이자 미국인들의 영원한 영화배우였다. “나의 사랑하는 미국 시민 여러분..”으로 시작하는 레이건 대통령의 연설이 시작되면 미국인들은 물론이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의 한 동작 한 동작, 그의 눈빛, 싱끗거리는 그의 입꼬리를 따라 흘러나오는 그의 연설을 넋을 잃고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영화배우 출신의 그 매력적인 한 동작, 한 마디가 전 미국인을 넘어 세계의 사람들에게 멋있는 대통령이란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그도 나이가 들어 병사한 후, 그의 관이 놓인 장례식장에 나지막이 흐르는 장송곡을 뒤로하고 이제는 늙은 낸시 여사가 조심스럽게 그의 관에 꽃을 한 송이 놓는 모습이 전 방송에 중계됐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줌으로 그녀에게 다가가는 카메라, 꽃을 관 위 성조기 위에 내려놓고, 짧은 입맞춤 후 나지막이 내뱉은 그녀의 한마디는 “See you soon. I miss you., 또 만나요. 보고 싶어요.”였다.

이라크전에서 유명을 달리한 남편 옆에서 하룻밤을 자게 해달라는 소원이 이루어져 장례식장 한가운데 신혼이었던 그녀의 남편의 관이 놓였고, 두 명의 정복 군인이 보초를 선 가운데 그 옆에서 담요를 깔고 하루를 보내는 젊은 미망인은 그와의 하룻밤을 마지막이라 여기지 않고, 다시 만날 날을 위해 가끔씩 일어나 기도하고 또 잠들며 긴 밤을 보냈다.

북유럽 스웨덴의 All saints day, 모든 성인의 날은 지나간 성인뿐 아니라 먼저 간 우리들의 친구들을 위해 근처 공동묘지를 찾아 촟불을 켜고 기도하는 날이다. 누군지도 모르고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먼저 간 내 이웃, 친구, 부모이기에 살아있는 자의 기도로 그들을 다시 기리고 종교적으로 내세에서의 행복을 빌어주는 전통이다.

종교적으로 죽음을 보지 않더라도, 인간은 오래부터 삶이 이어진다고 믿었으며 죽은 자와 산자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서양에서는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우리의 갈 길이며 단지 조금 먼저 갔을 뿐이라고 위로한다. 우주의 시간이나 역사에 비추어 보면 맞는 말이다. 수십 년, 혹은 수년의 또 다른 인생이 긴 시간의 실타래에서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그러나 인간이기에, 가장 존엄하고 존중받아야 할 인간이기에 죽음마저 존중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단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산다고, 아직 내가 살날은 더 많다고 아무리 떠들어 봐야 며칠을 자고 나면 누구나 똑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렇게 한없이 나약할 수밖에 없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인간의 갈 길이라면 그동안 인간이 해야 할 일들을 열심히, 행복하게 하는 편이 인간다운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죽음은 단지 다른 삶이라고, 그래서 다시 내가 다른 세상에 간다고 생각하면 죽음이 마치 여행으로 다가온다. 다만 어떤 사람은 먼저 여행을 떠난 것이라고, 나는 아직 예약일이 남아 있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죽음은 그리 공포스러운 것이 아니다.

아네스를 위하여

by L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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