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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의 세살 버릇은 여든까지 간다

Photo by Emelie Asplund / imagebank.sweden.se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어른들이 많다.  나이를 잡수신 분들도 어른이고, 풍부한 학식과 경험으로 사회를 리드해 주는 분들도 어른이다.  나는 이보다 더 이야기를 좁혀보려고 한다.  한 가정의, 더 좁혀서 부부간의 어른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북유럽에서 부부는 개인이다.  한 몸처럼 사랑하며 평생을 지내온 부부라도 결국은 혼자라는 사고가 바탕에 있다.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의 친구가 부부이고, 그 배우자라도 존엄한 인간이다.  그래서 더 솔직하고 존중하고, 나아가 인정하는 사고다.  그 단순한 단어가 부부간의 평등과 나아가 남녀평등으로 나타난다.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나의 사랑하는 한 사람을 위해 오랜시간 같이 생활한 부부가 솔직함, 존중, 평등 같은 가치 없이 사랑을 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가.  그 개인은 그래서 사회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어떠한 “성공”이란 가치를 만들었는지 보다 개인의 가치가 더 살아있는 사회가 어른스러운 사회는 아닐까 한다.

북유럽의 노인들은 나서지 않는다.  자녀나 주변의 사사로운 일에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인정을 평생 해온 사람들이기에 자기보다 어리거나 경륜이 없어 보여도 자신이 그걸 대신할 수 있다는 오만한 마음이 없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일에 자신이 나설 자격이 없다는 생각도 한다.  그래서 북유럽 노년의 삶은 지극히 소박하다.  주변의 환경이나 업적, 자녀들의 일은 물론이고 자신의 일까지 지극히 단출하다.  사고의 방향도 단순하다.  그 이유는 위에서 말한 타인에 대한 배려 이전에 자신에 대해 사고의 정립이 이미 된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이런 노년의 마음을 가르쳐 줄 수 있었을까.  학교에서 나이가 들면 이렇게 바뀌어야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준 건 아닐 것 같은데, 바뀌는 변화를 그저 그렇게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내가 혹시 사회나 배우자에 관해 지나친 점이 없었나 반성하는 그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유럽이나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서너 살의 유치원 아이들이 타인에 대한 삐뚤어진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부모로부터 배운 것이다.  그 어린아이들이 인종과 그로 인한 경험에서 나올 수 있는 차별을 스스로 학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세 살 적부터 이웃과 가족 내의 어른으로부터 삶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 어른이 어떤 사람이었던, 얼마나 많은 명예와 부를 가지고 있는 인생이었던 사고는 지극히 동일하다.  왜 그럴까.  왜 왕과 귀족들의 삶과 재벌, 부자들의 삶에서는 평생 찬란함이 있고, 평민이나 중산층 이하의 삶은 고달파야 할 것도 같은데 그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왜 큰 차이가 없을까.  얼마 전 작고하기 전 시골 고향으로 돌아가서 생을 마친 세계 1위의 재벌 이야기나 십수 년이 넘게 신분을 감추며 항공사에서 일했던 왕의 이야기, 그리고 내가 직접 겪은 동네 문화센터에서 꼬마들을 가르치던 오케스트라 지휘자들과 은퇴 교수들, 유리창을 닦던 전직 시장…  왜 이들이 크고 긴 리무진에 몸을 맡기고 동네와 이웃들을 돌아다니며 사사건건 참견을 하지 않을까.  내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내가 없었으면 너희들이 지금 살수 있었느냐며 책과 인터뷰에서 떠들고 다니지 않았을까.  그들은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세 살부터 보고 배운 걸 여든까지 쭉 지키며 살아온 사회의 어른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옳기만 할까.  나는 진실을 믿고 산다고 다들 생각한다.  특히 어느 문화에서는 내 인생에 오점은 있을 수도 없다고 믿고, 부부간에도 그렇게 위선에 떨며 평생을 산다.  진실은 하나가 아니다.  각자의 생각에서 진실은 여러 개로 나뉜다.  물론 입증될 수 있는 사실은 하나이지만, 모두들 각자의 환경에 따라 진실로 믿고 살아가는 게 인간이다.  내 진실이 아닌 다른 진실들은 틀린 것인가.  그 다름을 설명하고, 입증하려 노력하고, 속이고, 숨기며 평생을 사는 문화도 있다.  왜?  배우지 못했으니까.  내가 어떤 인간이고 인간의 삶에 대해 그 어떤 배움이나 선배도 존재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다.  그 세 살 버릇은 또 여든까지 왔다.  지금의 어른들이 떠드는 소리가 시대적으로 말이 안 되고 이기적이고 갑질인 이유는 그 어른들이 평생에 걸쳐 그런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다.  세 살 적 버릇이다.

여기까지의 글로 내용을 마쳐야 하지만, 한국식 교육의 영향으로 결론과 “시사점”을 추가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서글픈 마음으로 제시한 해결책은 시간이다.  지금의 어른을 잊자.  자연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정도로 생각하자.  나를 포함한 세 살 적 버릇을 가진 세대가 없어지는 시기, 지금의 세 살 아이들의 부모들이 세계 제일과 성공이란 지긋지긋하고 본인도 해본 적 없는 그 무언가를 위해 허우적거리는 경쟁 교육이 아니라 나를 위해 행복한 삶을 아는 거울이 될 수 있는 시기까지 시간이 흐르길 기다려야 한다.  내가 아는 세 살짜리 아이들이 아직까지 볼 거울이 없으니 좀 더, 아직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by L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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