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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해외 생활이 한국에서보다 편한 이유

Photo by Kim Wyon / VisitDenmark.dk

세상은 넓고 문화도 많이 다르다.  한국이 1989년 여행 자율화가 되면서 세계에 나가보기 시작했으니 세상과 접한 시기는 무척 짧다.  그 이후로 많은 한인들이 세계에서 살고 있다.  해외 생활은 사회생활과 비교적 긴 시간을 해외에 체류한다는 점에서 여행과는 다르다.  많은 정보와 공부를 하고 해외에서 살아보면, 비록 몇 주의 기간이라도 그 문화를 느낄 수 있겠지만 들뜬 마음에 나선 해외여행은 마냥 좋아 보이기만 한다.  나는 비교적 오랜 기간 해외 생활을 했고, 다시 한국에서의 생활을 경험했다.  오래지만 그리 오래인 것 같지 않은 생각을 추려본다.  이 글에서는 북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서구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쓸 것이며, 그 사회의 중산층 그리고 아주 보편적인 사고를 가진 현지인들과의 소통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

북유럽과 미국 같은 서구의 문화는 사람 간의 관계가 편하다.  많은 한인들이 생각하는 편한 점 중 하나는 고국에 있는 친척, 가족 간의 단절이다.  아이러니하겠지만 시댁, 처가, 친척, 형제, 나아가 친구들 간의 관계를 생각하면 편하다.  보고 싶지만, 마음뿐인 그리고 몰라서 좋은 일들이 많다.  예전 한국의 문화를 생각하면, 대가족은 물론이고 집성촌이란 곳까지 있었다.  부모와 친척들의 대소사며 가정사까지 서로 소통하고 공유하는 생활이었다.  그에 따라 어려운 일이나 가정의 고민 같은 일도 비교적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의 생활 양식에서는 이 같은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본성은 바뀌지 않았다.  하기 싫은 일은 피하고, 쉬운 일만 남은 것 같다.  그래서 삶의 간섭이, 도움과 교훈이라는 이름으로 숱하게 일어난다.  명절을 피하는 모습, 세대 간의 대화가 기피된다.  더 넓게 친구와 이웃, 더 나아가 직장의 동료들을 보면 더 기가 막히다.  자동차 하나, 아이들 학원 하나 바꾸는 것까지 시시 콜콜 조언(?) 한다.  사람 간의 관계가 피곤하다는 사람들, 그래서 내 개성으로 혼자만의 방식을 갖고 싶다는 사람들이 사실 뒤로는 더 심하다.  보통 “한국의 정”으로 포장한다.

북유럽과 미국에서도 그 관심은 존재한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상대를 존중한다는 좋은 말로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은 개인주의에 입각해 내가 오히려 침해받기 싫은 것이다.  내가 무슨 옷을 입던, 무슨 직업이던 내 존재에 큰 영향이 없다.  겉으로는 동네 산책하는 아저씨 같은 사람이 장관일 수도, 대기업 총수일 수도 있다.  스톡홀름 근처 동네의 문화센터에서 유리창을 닦던 할아버지가 필하모니 지휘자 출신인지 아무 관심도 없고 그 사람과의 관계에 달라질 것도 없다.  옷차림과 소지품으로 사람의 인격이 달라지지 않으며, 그렇기에 모든 사람을 첫 만남으로 판단할 수 없다.  북유럽만큼은 아니지만 미국도 비슷한 사고를 공유한다.  그래서 미국에서 아주 비싼 물품을 파는 매장에서는 고객을 남성은 시계, 여성은 가방으로 판단한다.  살만한 경제적 능력이 있는지 그래서, 더 좋은 서비스를 주어야 하는지 쉽게 판단하는 요소다.  요즘은 트렌드에 맞추어 조금 바뀌었다고 듣고 있다.  북유럽과 미국 같은 서구문화의 사람 간의 관계는 상대를 그저 이해해주려는 선에서 그친다.  그 이상의 관계에 들어가도, 기본적인 선은 약간의 변화 외에 바뀜이 없다.  그래서 눈치 보고, 신경 쓰고, 남들이 뭐라고 할까 의식하는 생활이 아니다.

둘째로는 사회적 시스템이다.  법과 규범 같은 규율부터, 공공 서비스 같은 시스템이 지극히 편하다.  한국의 헌법은 1948년 7월 17일에 제정, 공포된 제헌헌법을 바탕으로 한다.  공포 약 1년 전부터 대한민국의 헌법의 초안을 작성한 유진오는 당시 유일한 헌법의 전문가였고, 그의 안을 기초로 하여 세계의 여러 나라들의 헌법을 참조한 권승렬의 안과 섞어 만든 성문헌법이다.  지금 비교해 보면 독일과 프랑스, 미국의 헌법 내용의 일부가 들어가 있을 정도로 민주주의의 선진국들에서 참조한 것이다.  그 이후 9차례의 개정을 통해 지금은 그 형태가 많이 바뀌었지만, 자유 민주주의의 이념이 남아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은 그것을 인정하고 수호하는 국민의 지지에 기반을 두고, 의지에 따라 여러 형태의 법질서가 이어진다.  헌법 공포 불과 3년 전에는 식민지의 상태였고, 그 이전의 역사는 수천 년간 왕권 통치의 시기였다.  다시 말해 헌법을 만들기 위한 바탕이 전혀 없던 상태의 사회적 시스템은 빌려 입은 옷처럼 숱한 모순과 정치적 타협의 대상이 되었다.  후일의 위정자들은 법과 질서의 시스템보다 당장 살아남기 위한 정책으로, 당의 욕심을 위한 계파 싸움으로, 이념 전쟁의 아이콘으로 헌법을 이용했을 뿐 왜 법과 질서, 사회적 시스템 같은 삶의 기본 규율을 지켜야 하는지 몰랐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증명되는 문화의 한 단면이다.  피하고, 없애고, 나만 아니면 되고, 요령껏 이용하는 게 능력이고 지식이었다.  지금은 안 그런가?  그런데 이것이 피곤한 이유는 생활 곳곳에 법과 질서, 규율을 어기면서도 전혀 거리낌 없는 당당함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작게 보면 교통법 위반, 세금포탈, 부당 임금에서부터 침 뱉고, 약자 괴롭히고, 술 먹고 난동 부리는 비 문화적 행동도 모두 사회적 시스템을 무시하는 한 가지일 뿐이다.

서구는 다시 내가 안 하니 다른 사람도 하지 말라는 전제가 있다.  그래서 역으로 동네를 깨끗이 하려면 나부터 해야 다른 사람도 한다는 생각이다.  법은 물론이고 지나가다 저지른 실수에도 반드시 사과해야 직성이 풀리는 문화다.  양보하고, 줄 서고, 불법 주차 없는 건 물론이고 뭐라 할 수도 없는 각종 규율들이 동네마다 숨어있다.  “약속”이라는 이름으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반드시 해야 이웃을 위하는 것이라든지, 이 동네의 한 길은 야생동물이 다니니 주차는 다른 곳에 하는 것 같은 것들이 불문율이고, 누구나 반드시 지킨다는 점이다.  어느 해인가 크리스마스 트리 점등이 좀 늦은 우리 집을 보고 옆집 주인이 심각하게 물어본 적이 있다.  혹시 장기 여행을 계획하느냐고, 그렇다면 자기가 우리 집 앞에도 같이 트리 장식을 해줄까 하는 것이었다.  해프닝이지만 “로마에서는 로마법”이란 것이 절대로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큰 법의 테두리를 떠나 생각해도, 북유럽과 미국의 법과 사회적 시스템은 “반드시 상식에 기초”한다.  모든 법이 사람과 그 생활의 자유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렇기에 사람들의 생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고의 바탕이 있다.  혹시 자세한 법은 법 내용은 잘 모르지만, 그 문화의 상식에 그럴 것 같다고 판단되면 대부분 옳은 판단이다.  그래서 예측 가능한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서구의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일처리가 느리다.  한국과 비교하면 그렇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느리기에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다.  나도 느리게 하면 되니까.  그것이 문화고 한번 적응하면 언제 어떻게 될 것인지 예측이 가능하다.  북유럽과 미국의 상식에 기초한 일이라면 반드시 되는 일이고, 그렇지 않다면 절대 안 되는 일이다.  안되는 걸 이루려는 노력조차 무의미하다.

셋째는 교육 시스템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은 어느 나라, 문화를 떠나 가장 좋은 미래를 위한 투자다.  한 후진국을 방문한 외국의 대통령이 대학생들의 눈빛에서 미래를 보았다는 이야기는 그냥 정치적으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전후 비참해진 독일과 핀란드의 미래는 교육으로 이루어졌고, 수십 년이 흐른 후 상상은 현실이 됐다.  한국도 다르지 않았다.  관료, 부자, 기득권층으로의 바램은 인맥이 전무하던 가난한 사람들의 탈출구로 쓰였다.  교육은 지극히 개인적인 발전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사회적 가치이다.  문맹률 최저, 고학력 사회에 접어든 한국이 가장 신뢰하는 자산인 교육은 현재 그렇게 자랑스럽지 만은 않다.  그 이유는 한국의 교육이 후진적이라거나 질이 떨어져서가 아니다.  교육을 단지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삐뚤어진 목적의식 때문이다.  대학 입학생이 공무원 시험공부하는 사회, 수학, 영어, 국어를 제외한 과목 시간에 잠을 자는 학생을 뭐라 할 수 없는 교육시스템은 차라리 학교를 학원으로 바꾸고 전 학생 졸업 자격시험 시스템이 더 효율적일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기초 교육의 목적은 다시 생각하지만, 그 시대 보편적인 상식과 삶에 대한 기본 지식을 가르치는데 있다.  내가 왜 공부하는지는 고사하고, 하루하루가 싫어지는 교육 현장이 한국의 미래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북유럽의 시스템은 뭐 할 말이 없다.  초등학교 과정중 언어, 수학에 전 세계 꼴찌이던 북유럽 나라들이 대학에서의 평가에서는 왜 최상위권인지.  몸이 불편한 장애 아이를 위한 특수 학교가 왜 북유럽에는 존재하지 않는지.  성적을 안 내고 얼마나 노는가 보는 것 같은 학교들에서 왜 그렇게 많은 수재들이 나오는지.  이젠 궁금하지도 않다.  자연을 따라, 내가 사는 방법과 왜 그리고 어떤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더 중점을 둔 결과이고, Internalization, 내면화라는 이름으로 초등학교 전 과정을 마쳐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는 문화다.  심지어 초등학교 1학년부터 숙제도 스스로 범위와 기간을 협상하여 제출하고, 학부모 면담도 참석하여 본인의 의사를 말하는 문화다.  미국은 또 이와 반대로 무한 경쟁이 몸에 배어 있는 시스템이다.  우수한 학생이 그룹을 이끌고, 나머지는 그를 따르며, 뒤처지는 학생에 대한 배려와 양보, 앞에선 학생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동시에 일어난다.  강자의 논리를 정당화하지만, 강자는 지극히 양심적이고 배려하는 강자라는 사실을 어려서부터 배운다.  사회도 결국 이 같은 가치로 움직이며, 리더의 기본적 양심과 자질은 배려와 양보이다.  그래서 북유럽과 미국의 교육 시스템은 적어도 학생들이 왜 공부를 하고, 실제로 어떻게 쓰여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명확하다.  그것이 필요 없는 경우라면 교육에 대한 다른 대안도 존재한다.  공부로, 성적으로 개인의 미래가 바뀔 수 있지만, 다른 개성이나 흥미로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회적 시스템이 같이 맞물려,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고 그래서 더 집중하는 교육이 탄생한다.  누구나 공부를 잘 할 수 없고,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은 함께 사는 마음이나 세계적 시야 같은 관점이다.  폭넓은 시야라고 말하고 싶다.  지리학적 섬나라인 한국은 교류에 익숙지 못하다.  2천 년 전 북 대륙 영토가 한국의 역사로부터 떨어져 나간 이후로 지속적인 해외 문화의 교류는 적었다.  조선말의 통상 전쟁들을 말하지 않아도 얼마나 한 곳에 만족하며 안락을 추구하는 선비의 나라였는지 알 수 있다.  산업구조가 바뀌면서 다른 곳과의 교류는 필수로 다가왔고, 이미 정보를 가진 선점국가의 이득은 놀라웠다.  한국의 개화기에는 다른 것을 배우고, 익혀도 뒤늦은 시기에 수줍음에 어찌할 바 모르는 학생의 모습으로 세계 시장에 다가갔다.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시절 외세의 눈에 비친 한국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그 이후 변화에 변화를 시도한 한국은 당당하게 세계에 진출했다.  지금도 어느 분야에서는 세계를 리드하는 모습이 많다.  그런 자신감이 좋지만, 지극히 일부의 일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세계를 어려워하고, 익숙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피하며 교류하려 하는 선비정신(?)이 남아있다.  이것은 교류의 역사가 없었고, 내 것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내 것만 보이는, 상대가 뭘 생각할지 알 수도 없는 좁은 소견이 나타난다.  아시아 내에서 그렇게 세계화를 일찍 실시하고, 국가 정책으로도 개방을 외쳤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한국이 개방화는 요즘 더 앞선 것 같기도 하다.

세계와 교류가 힘들었던 것은 북유럽도 마찬가지였지만, 교통이 발달하면서 인접국가와의 교류, 식민 역사, 전쟁 역사를 통해 세계는 넓고 무척 많은 문화가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소통하고, 거래하고, 왕래하면서 서로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 내가 지킬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문화적 우수성의 가치와 그 이로움에 부러워 몸서리치던 북유럽의 시기도 있었다.  이것들을 정리해서 완성한 미국은 예외였지만 이미 유럽의 문화적 이해를 바탕으로 했기에, 태생적인 문화 대국으로 커졌다.  서구의 일은, 한 조그만 상점을 포함하여 단지 그 나라, 동네로만 끝날 것을 전제하지 않는다.  어느 곳의 무엇과 어디의 아이디어를 지속적으로 보고 경쟁하며 서로 발전한다.  지금은 정보의 교류로 환경이 한국과 크게 차이 나지 않지만, 문화적 사고의 자체가 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크게 차이 난다.  나라 자체를 다른 곳, 가기 어려운 곳, 다른 말을 쓰는 곳 같은 걸림돌로 생각지 않고 그저 옆 동네 정도로 생각하는 사고는 마케팅의 차원을 넘어 사고의 범위가 상당히 다르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반대로 이해하자면, 좋은 점도 무척 많다.  공공 시스템이 빠르고, 보편적 복지가 비교적 잘 이루어지는 문화이고, 교육 시스템과 대중교통 시스템, 의료 보험에서도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  그러나 이 같은 장점도 좀 넓은 눈으로 이해를 하려고 해야 보이는 장점이다.  먹거리나 놀 거리 같은 장점은 당연히 한국인으로서의 생활에 맞는 것이고, 비교적 치안도 좋은 편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어디에 살 것인가, 어디 가 좋은가 같은 비교를 하지 않는다.  이점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같다.  모든 문화는 나에게 좋은 것과 불편한 것이 있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너무 싫어하면 나에게 그런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웃다 보면, 기대나 비판도 줄어드는 걸 발견한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고 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이 없다.  오히려 내가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한국에서의 사고이지만, 이는 전 세계의 문화에 해당한다.  오히려 나에게 정확히 좋은 나라와 문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 같은 점에서 보면 내가 다시 해외에 갔을 때 한국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

 

by L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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