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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중심 사회의 오해

Photo by Johan Willner / imagebank.sweden.se

인류가 만든 사회들 안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가족이란 사회는 인간의 가장 작은 사회 단위다.  최근 사회 트렌드에 셀룰라라는 단어를 쓴 세포 가족이란 단어가 나오긴 했어도 아직까지 전통적인 가족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이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말한다.  나는 가족이란 단어 이전에 개인에 더욱 집중한다.  그래서 우리가 예측 가능한 거의 대부분의 사회적 문제는 개인의 사고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만일 가족 안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것마저도 개인이 충분한 사고와 판단을 놓친 결과로 생각한다.  여러분이 충분히 알고 있지만, 개인의 문제보다 사회적인 문제가 파장이 클 수밖에 없고, 이와 같이 가족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보다 더 심각하다.  언급한 문제는 서로 간의 대화 단절, 관계 불평등, 존중, 책임, 경제, 성격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다른 모습을 가진 사회를 보면서 가족 중심이란 말이 무엇인지 말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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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가족 관련 표어

 

단순히 환경적 뒷받침으로 본 자녀 양육의 조건에 관한 조사를 보면 (Save the Children 의 양육에 가장 위협을 받지 않는 나라, 2018년), 아시아의 싱가폴에 이어 북유럽의 국가들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뒤 한국이 차지하고 있다.  환경적 배려에는 안전과 경제적인 면이 당연히 같이 한다.  이 조사는 결과를 나타냈고, 자세한 순위는 사실 별 의미는 없다.  크게 북유럽을 중심으로 한 그룹과 한국과 싱가폴이 리드하는 두 가지 그룹으로 나뉜다.  이 두 가족 중심의 사회는 어떻게 다를까?  어떤 개인의 사고로 가족이 만들어졌을까?  그렇게 가족적인 한 사회에서 왜 가족으로 인한 문제가 대두될까? 등이 내가 품은 의문이다.

북유럽의 5개국에서 양육을 이야기하면 복지라는 단어를 연상한다.  이는 사실이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매월 적게는 20여만 원에서 60여만 원의 양육비를 제공한다.  교육과 의료 외에도 세금 감면, 주택 제공 혜택 같은 간접적 지원을 포함하면 다른 나라에서는 매력적인 복지라고 불릴만하다.  여기에 1년 반이 넘는 육아 휴직, 부모가 같이 생활할 경우 남녀 모두 반드시 쉬어야 하는 조건, 급여의 80% 이상 보장 조건, 자녀의 양육 시간에 맞춘 출퇴근 시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가족 우선에 대한 동의 등도 무척 매력적이다.  내가 처음 스웨덴에 갔을 때 자녀의 이유로 일찍 퇴근하는 회사원들을 수없이 보았으며, 근무 중에도 자녀에 관한 일은 예외로 인정되곤 했다.  더하여 이 같은 가족 중심의 사회에 대한 사고에는 편부모, 동성 부모, 입양의 자녀 등 거의 모든 상황이 전통적 가족과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이런 화려한 스펙에도 가장 감동적인 부모의 개념은 사랑이다.  동거나 결혼을 막론하고, 자녀는 사랑의 결실이고, 부모는 그것에 대한 생명을 책임진 사람이란 개념이다.  아무리 어린 부모라도, 부모에 대한 개념이 극히 깊다.  그리고 여기에 북유럽 사회의 전통 개인주의가 들어간다.  여러 번 말하지만 이기주의와 차별되는 개인주의는 나와 상대가 평등하며, 나에 대한 배려는 상대를 존중할 때 나온다는 지극히 평등한 개념을 바탕으로 한다.  그래서 개인주의자들만 모여사는 마을은 무척 평화스러울 것이란 상상을 한다.  이 개인주의의 개념은 자녀에게 정확히 표현되어, 자기의 자녀 이전에 사회의 구성원이고, 자신의 지식보다 보편 평등한 공교육을 신뢰하며, 자신의 미래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놀라운 자녀 교육관이 만들어진다.  플러스, 공교육의 교육 시스템은 유아원 시절부터 사색하고 깊이 생각하는 내면화 교육을 바탕으로, 개인의 존엄과 그것으로부터 연결되는, 가족을 포함한 사회 구성원에 대한 인식을 우선으로 심는다.  더하여 자연주의, 인본주의, 미니멀리즘에 입각한 기능주의 같은 인간이 만든 아름다운 철학적 개념이 자연스럽게 섞인다.  너무 아름다운 말을 골라서 쓴 것이 아닌지 다시 읽어보아도, 추가될 말 외에 다른 것이 생각나지 않을 정도다.  그래서 한마디로 자녀는 “내 소유물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이며 존엄한 한 개인”이란 사고가 아주 밑바닥에 깔려있다.

부모도 마찬가지다.  이미 부모는 나에게 그런 교육을 준 모체다.  그래서 북유럽에 혼자 사는 노인이 가장 많은 지도 모르겠다.  외롭다는 우리의 개념은, 공동체를 스스로 계획하거나 사회적 봉사라는 당연한 사고로 북유럽에선 바뀐다.  그래서 북유럽에서는 자녀에 대한 책임감, 부모에 대한 걱정이 다른 문화보다 훨씬 적다.  나는 자녀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 매일 헤어질 준비를 한다고 말한다.  어설프지만 내가 보고 배운 북유럽 사고를 어디서나 같이 한다고 믿는다.

내가 자란 가족 제도는 대가족이었다.  시골에서 큰 전통가옥을 바탕으로 하는 확대 가족에 가까웠다.  친척들을 위한 방과 다른 식구들의 방도 따로 있는 구조였다.  매 달이 바뀌면, 머무는 친척들이 바뀌고 부엌에는 항상 밥하는 냄새가 났었다.  강아지, 고양이, 새, 금붕어 등 수십 마리에 달하는 애완동물들과 식구 수를 적는 난에 몇 명인지 잘 모르겠다고 답했던 기억도 난다.  이 같은 어릴 적 추억은 너무 소중하고, 다시 할아버지, 할머니 품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다.  그러나 이 같은 대가족 사회는 서로 돕고, 같이 문제를 해결하는 공동체의 장점 외에도 공동체의 연대 책임 같은 단점도 있었다.  문제 하나 없는 집안은 없다는 말을 들어 보았듯이 가족 내의 문제는 작건 크건 항상 일어났고 그 가족을 책임진 몇 사람의 중재가 절대적이었다.  한마디로 연대책임.  더 과거로 가보면, 집안의 명성과 수치는 그 가족의 대표에 대한 것과 같았다.  가문에 먹칠, 얼굴을 못 들 정도의 수치 같은 말은 가족 구성원 한 사람이 다른 구성원들에게 미친 영향력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서로 나누고, 쉽게 물려주고, 같이 해결하는 큰 장점 외에도 나쁜 것도 같이 책임져야 하는 단점도 있었다.  이 같은 개념에 대한 근원이나 장단점은 너무 잘 알기에 생략하더라도, 그에 따른 자녀에 대한 개념은 잊을 수 없다.  나와 같은 존재이거나 또는 그 이상의 존재, 부모를 넘어서 가족 사회와 유기체적 동일성을 갖는 존재가 이 같은 전통 대가족 사회의 자녀에 대한 개념이다.

대부분의 한국 내 가족 사회의 문제는 자녀에게서 기인한다.  가족 구성원의 중심이며, 목표이고, 내 삶이기도 하다.  정확히 북유럽에서 주장하는 “가족의 중심은 부모이며, 자녀는 사랑의 결실”이란 말에 반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올인 한다.  부모가 100을 벌어도 100을 자녀에게 줄 수 있는 사회다.  같은 아시아 국가인 타이완이나 일본에 비추어 보아도 자녀에 대한 올인 투자는 한국이 유일하다.  같이 보는 부모에 대한 개념도 비슷하다.  홀로 사는 노인은 자식이 없는 사람으로 보고, 자녀에게 무한 책임을 강조하는 것이 효도라는 단어다.  겉모습은 셀룰라 가족이면서 대가족의 책임으로 자신의 가족을 대한다.

위에서 설명한 개인의 사고에 따라 사회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내 주장보다, 개인의 사고가 가족으로 나타나고, 결국 사회적인 책임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의심을 받는다.  더하여, 두어 세기 전에 대부분을 차지하던 어르신들은 이제 없다.  나는 무식하고, 학교도 다닌 적 없는 어르신들에게서 큰 감명을 받은 적이 많다.  그들이 남녀평등이나 노동시간의 단축을 주장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경제적 고통과 사회적 무시 속에서도 할 일을 다한 부모님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삶이 그런 줄 알았던 숙명론자이거나 인내의 끝을 보여준 무던한 성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무조건 주는 것이란 진리처럼, 그 부모님들은 무조건 주고 자신은 그런 줄 알았던, 희생이 생활이 된 분들이었다.  그들이 나는 전혀 무식해 보이지도, 품격이 없어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서로 양보가 미덕이었던 그 혹독한 조건에서도 가족 안에서 꽃을 피운 분들이란 걸 안다.  두어 세기 전에 존재했던 그분들은 자신의 존재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다음 세대를 키웠다.  한국 전쟁을 전후해서 태어난 세대들은 이제 노인이 되었다.  그들은 다르다.  좀 더 목표 지향적이고, 그 이전 존재했던 대가족의 연대 책임도 지지 않는다.  다시 그다음 세대는 더욱 업그레이드된 목표 지향 세대다.  세계와의 비교로, 자본과 힘의 균형을 맞추며 교육과 자본을 무기로 하고 있다.  이쯤 되면 자녀관이 달라져야 하는데, 더욱 굳어지는 계기를 맞았다.  나 자신을 보는 사회적 눈이 내 자녀에게 맞춰질 것이란 상상이다.  마치 허세로 명품 치장을 하는 것과 같다.  내 자녀는 내 삶의 결과이고, 내 평가란 생각을 한다.  또 정확히 “내 자녀가 행복하길 원합니다.  사회와 이웃을 존중하며, 자신이 좋아하는 일로서 사회에 봉사하기 바랍니다”라는 북유럽에서 자녀에게 바라는 것이란 답을 정확히 반대로 한 결과다.

가족 중심의 사회는 가족 구성원 개인들이 중심이 되는 사회다.  그들 모두 존중받고 의견을 내는 것이 가족이고, 같이 사는 시간까지 서로를 개인으로 여겨주는 것이 할 일이다.  자녀나 부모가 가족의 문제로 생각되는 이유는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조차 돌아볼 수조차 없으면서 존엄한 다른 개인을 마치 조정할 수 있다고 상상한 것이 근원이다.  가족 중심이란 같은 단어에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나온다.

 

by Lu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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